[CITY 100] 여행 중

in Wisdom Race 위즈덤 레이스last year



보따리를 이고 지고 집에 막 도착한 나를 보고 엄마는 경악했다. 얼굴이 이게 뭐니. 그때의 나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실은 며칠 아팠어(굶었어). 라다크에 있는 동안 엄마에게는 아프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씻고 침대에 눕자마자 기절했고, 서너 시간 후에 일어나 용산역으로 향했다. 크루즈 관련 행사에 초청된 젠젠 작가의 일일 매니저가 되어 여수 출장에 동행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건 미친 짓이다. 이런 미친 짓을 가능하게 하는 건 정신력인데, 라다크에서 양껏 끌어다 쓰는 바람에 잔량이 간당간당했으므로 바닥까지 박박 긁어모아 삼켰다.

여수엑스포역 앞에서는 여수 밤바다 세레모니를 빼먹지 않았다. 그러자 피로가 저만치 사라지고 제법 설레는 기분이 들었다. 숙소에 도착하니 자정이 가까웠다. 열차에서부터 이어진 연습벌레 젠젠의 중얼거림은 그칠 줄을 몰랐다. 컵라면과 함께 맥주를 마시고, 환승연애를 보며 한참을 떠들다 보니 어느덧 새벽 세 시가 다 되어 침대에 누웠다. 어쩐지 잠이 오지 않아 여수 맛집을 검색했다. 여수에 오면 다들 게장을 먹는다는데 나는 게장을 못 먹는다. 게장을 좋아하는 젠젠을 위해 게장도 팔고 생선구이도 파는 식당을 몇 군데 찾아두었다. 네 시가 넘었을 때 눈꺼풀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마침내 주저앉았다.

다음 날 아침 나보다 먼저 눈을 뜬 어미새 젠젠이 호텔 1층에 있는 스콘 가게에서 스콘과 커피를 사 왔다. 나는 여전히 이불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반쯤 눈을 감고 젠젠이 건네는 스콘 조각을 날름날름 받아먹었다. 런던 빅토리아 앤 앨버트 뮤지엄의 카페에서 먹었던 스콘 참 맛있었어, 생각했다. 서둘러 메이크업을 시작했다. 내 얼굴에는 못 해도 남의 얼굴에는 곧잘 한다. 스콘과 커피로 아침 식사를 대충 때우고(대충이라고 하기엔 꽤 많이 먹음), 한 손에 대본을 든 젠젠 얼굴에 퍼프를 팡팡 두드리고 있으니까 진짜 방송인의 대기실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긴장된다고 청심환까지 챙겨 먹더니 젠젠은 무척 잘 해냈다. 방송 체질인 것 같다. 행사가 끝나고는 사회를 보았던 분과 공식 만찬을 기다리며 치맥을 했다. 금세 취기가 돌았다. 만찬장에는 여수 시장도 왔다. 만찬주로 테이블에 오른 막걸리는 여수 시장의 고향에서 만든 것이었는데 코푸시럽 맛이 났다. 너무 맛없었다. 우리는 대신 와인을 열심히 마셔보기로 했다. 와인 한 병은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와인을 더 달라고 요청했지만, 여분의 와인이 없다는 직원의 말에 우리는 일제히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기념품으로 받은 텀블러가 꽤 아름다워서 기쁜 마음으로 만찬장을 떠났다.

해변에 정박한 커다란 배가 보였다. 해변을 걸으며 배에 대하여, 배를 타는 사람들에 대하여, 바다에 대하여, 잠시 떠들다가 근처의 펍으로 향했다. 여수 밤바다라는 이름의 맥주를 마시며 여수 밤바다 위로 터지는 불꽃을 구경했다. 남미 여행 후 남미병에 걸려서 한동안 페루 음악만 들었다는 사회자분이 페루 국민밴드의 음악을 들려주었다. 그는 노래 중간중간 스페인어로 "자, 다 같이!", "살리고! 살리고!" 같은 느낌의 추임새를 붙였다. 너무 흥겨워서 앉은 채로 덩실거렸다. 페루에는 언제 가게 될까. 마추픽추 대신 수크레를 선택했던 라파스에서의 시간이 지나갔다. 매연 냄새와 케이블카, 부에나스 따르데스, 따뜻한 인사를 나누던 콜렉티보 안의 사람들.

두 번째 맥주를 시켰지만 기차 시간 때문에 다 마시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차를 타러 가는 길에 익숙한 향기가 코끝을 스치길래 걸음을 멈췄다. 잠시 킁킁거리며 주변을 살피다가 만리향 나무를 발견했다. 와! 만리향이다! 그리웠던 황홀한 향기. 꽃이 달린 가지를 꺾어 코밑에 달고 그 가을 일본 미노오의 논밭과 하늘을 떠올렸지. 토요일에는 란이 서울에 온다.

내가 찾은 여수 맛집에는 결국 가지 못했다.

어쨌든 여전히 여행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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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누비고 사시네요. 감기 조심하세요. ㅎㅎ

 last year 

춘니져..수고 많았어요! 다음에 여수에서 꼭 생선구이 사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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