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공 속의 강

in #krlast month

3일이란 짧은 시간동안 한국에 있다가,
또 다른 일로 미국에 오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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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출발해 계속 동쪽으로 이동하는 중입니다.
그런데 올해 여름엔 파리에서 미국을 거쳐 다시 서쪽으로 넘어가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벌써부터 눈앞이 깜깜합니다.

서쪽으로 비행하는 편이,
동쪽으로 비행하는 편보다 소요시간이 더 길어지는 날이 많기 때문입니다.

지구는 자전합니다.
남극과 북극을 관통하는 축을 기준으로,
우리가 지구 위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볼 때 지표는 동쪽으로 움직이고,
그래서 우주에서 보면 지구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도는 셈이죠.

왜 동쪽으로 가는 편이 더 빨라지는 경우를 자주 만날까요?

동쪽으로 갈 때 뒷바람이 불면 지표 속도는 빨라지고,
서쪽으로 갈 때 맞바람이 불면 지표 속도는 느려집니다.
그러니 같은 거리라도 소요시간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왜 하늘에는 동쪽으로 부는 바람, 특히 상공에서 강한 서풍이 자주 생길까요?

적도 부근은 극점 근처보다 더 많은 태양빛을 받습니다.
그 결과 적도는 더 따뜻해지고, 극은 더 차가워집니다.
따뜻한 공기는 팽창하고, 차가운 공기는 수축합니다.
이 차이는 공기 기둥의 두께와 압력 분포를 바꾸어
위도 방향으로 기압의 경사를 만들어 냅니다.

원래라면 공기는 단순히
“높은 압력에서 낮은 압력으로” 곧장 흘러가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지구는 회전합니다.
회전하는 세계에서 움직이는 물체는
진행 방향의 옆으로 살짝 밀리는 듯한 가상의 힘을 느끼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전향력 (轉向力) 입니다.

북반구에서는 동쪽으로 가려 하고,
남반구이서는 서쪽으로 가려 하고,
위도가 극에 가까울 수록 이런 힘이 강해집니다.

그래서 상층 대기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기압 경사가 공기를 직진시키려는힘이라면,
전향력은 공기를 옆으로 비틀어 흐르게 합니다.
둘이 균형을 이루면 공기는 더 이상 목표를 향해 돌진하지 않고,
등압선과 나란히 길게 미끄러지듯 흐르기 시작합니다.

이때 적도와 극의 온도 차이가 큰 중위도 상공에서는
그 흐름이 특히 강해지고,
대체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뻗는 거대한 바람의 띠가 만들어지는데,
우리가 제트기류(Jet stream)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계절, 어떤 날에는
하늘에 마치 보이지 않는 강이 놓입니다.
동쪽으로 흐르는 강입니다.

비행기는 그 강 위를 달립니다.
동쪽으로 가는 비행은 그 강의 흐름을 뒷바람으로 얻고,
서쪽으로 가는 비행은 그 강에 맞서 헤엄치게 됩니다.
그 차이는 생각보다 큽니다.
같은 기체, 같은 거리라도
도착 시간은 한두 시간씩 달라질 수 있습니다.

베링해를 지나 미주로 향하는 항로가
그 제트기류와 기막히게 겹치는 날이 많습니다.
그런 날엔 미국으로 가는 비행이 유난히 짧게 느껴지고,
반대로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은 같은 하늘 아래서도 더 길어지곤 합니다.
지도 위의 선은 같아 보이는데,
그 선 위에 흐르는 공기의 강은 하루마다 모양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서쪽으로 비행하는 편이 더 오래 걸리는 것은
지구가 나를 붙잡아 끌어당겨서가 아니라,
지구가 만든 대기의 흐름, 즉 보이지 않는 강물이
내가 가는 방향과 부딪히기 때문입니다.

같은 길이라 할지라도,
가는 방향에 따라 속도가 다르고,
보이는 것도 다릅니다.

어쩌면 삶도 비슷합니다.
우리가 느끼는 ‘내 속도’는 내 의지만으로 결정되지 않고,
보이지 않는 흐름, 예를 들어 계절 같은 운, 사람들의 바람, 사회의 기류에 의해 계속 조정됩니다.
뒷바람을 타면 빨리 도착하지만 풍경이 스쳐 지나가고,
맞바람을 맞으면 더디지만 그만큼 더 많이 관찰하게 됩니다.
그러니 어떤 날의 느림은 실패가 아니라,
방향을 고집한 대가가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세계의 결을 손끝으로 더 또렷이 읽어내는 시간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