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팀 시티에서 음악하기

in #stimcity3 years ago (edited)

어제는 20세기 소년에서 천재피아니스트(줄여서 천피)로 불리는, 친한 오빠인 @jazzyhyun과의 약속이 있었다. 원래도 바빴지만 결혼 준비까지 더해져 더욱 바빠진 천피에게서 곡을 봐줬으면 좋겠는데 목요일에 시간이 되냐는 연락을 받았다. 피곤하기도 하고 집중이 되지 않을 것 같아 나중에 볼까 하다가, 오빠의 곡이 궁금해 무리해서라도 보기로 했다.


노드를 받은 후로 내게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20세기 소년에 초대해 스팀 시티 사람들에게 소개하곤 했는데, 그 일을 돌아보며 그것이 시즌1 정도가 될 테고 시즌2는 음악 하는 아티스트 동료를 초대하는 것이 되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최측근이면서도 좋아하는 아티스트인 천피가 노드를 치는 첫 번째 연주자가 되기를 내심 바랐다. 그리고 그게 어제 부산을 다녀와 피로한 몸으로 천피를 만난 또 하나의 이유기도 했다.


천피는 조언을 구하고 싶다며 자신이 쓴 곡의 악보 뭉치를 들고 왔는데, 악보의 양, 악보에 적힌 자세한 지시 사항, 곡에 대한 고민, 곡에 담긴 음악 이론들을 보면서 나는 끝없이 연습하고 작업하는 그의 모습이 정말로 존경스럽게 느껴졌다. 함께 노드 앞에 앉아 천피의 곡들을 함께 들었다. 늘 그렇듯 낯설고 어려운 어법이었다. 가장 흔한 IIm7-V7-IM7 진행을 가장 사랑할 정도로 아름다운 화성 진행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그 음악이 너무 낯설어 웃기기도 하고, 어떻게 하면 이런 곡을 쓸 수 있는지 그의 내면이 궁금하기도 하고 그랬다.

곡을 빠르게 훑은 후에는 지하에 손님이 내려와 연주를 멈추고 소파에 기대 함께 대화를 나눴다. 주 내용은 힘들다는 징징거림이었고, 오빠는 매번 그래왔듯 다정하고 따뜻한 말들로 나를 북돋아 주었다. 대화의 말미에는 우리가 같은 팀을 하며 전국을 돌아다니던 이야기가 나왔는데, 당시에는 괴로웠지만 지나고 보니 그것마저도 즐겁고 소중한 추억이었음을 되새기게 되었다.


나는 천피를 만나면 나를 위해 연주해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소파에 앉아 한참을 징징거리면서 요즘 힘드니 연주를 해달라 했고, 편한 음악을 듣고 싶으니 평소처럼 말고 듣기 편하게 연주해달라는 무례한 부탁을 했다.

한 팀 있던 손님이 떠나고, 오빠는 남은 맥주를 다 마신 후에 연주를 시작했다. 나는 해먹에 누워 그 연주를 들었다. 그를 오래 봐왔지만, 나조차도 이렇게 잘했었나 놀랄 정도로 아름다운 연주였다. 두 곡을 연달아 듣고, 오빠와 함께 작업했던 곡을 부르고, 사랑가를 함께 불렀다. 그리고는 내가 좋아하는 스탠다드 곡들을 요청했다.

나는 여러 곡 중에서도 The song is you가 정말 좋았는데, 그것이 내가 엄청 좋아하는 스탠다드라는 것과 밖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그의 엄청난 따뜻함이 고스란히 담긴 연주였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오로지 나의 행복을 위해 하는 연주라는 사실이 나를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나는 흔들리는 해먹에서 그의 연주를 들으며, 그가 연주할 곡을 쓰겠다고 다짐했다.


노드를 받은 후 지금까지는 내 주변을 정리하고 돌아보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그 안에서 음악을 하려고 애쓰긴 했지만 막막하기도 했고, 한편 음악에 대한 심도 있는 이야기를 나누질 못해 어떤 답답함이 나를 계속 따라다니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어제는 음악 이야기를 많이 하진 않았지만, 함께 음악을 하던 가까운 연주자의 연주를 듣는 것만으로도 음악적인 해소가 되는 날이었다.

그의 연주를 들으며 내 주변에 정말 멋진 연주자가 많다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되었고, 내가 원한다면 언제든 그들이 나와 함께 하리라는 것, 나의 음악을 오래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오랜만에 엄청난 창작 욕구가 샘솟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천피와 지하철을 타고 돌아가는 길엔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우리가 좋아하는 천재 섹소포니스트를 초대해 함께 연주하자는 말을 나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무슨 일인지 버스를 잘못 타 평소보다 30분이나 더 걸렸지만, 그 시간마저도 음악을 더 들을 수 있어 행복하게만 느껴졌다.

농담처럼 하던 지하를 스튜디오로 만들자는 말, 그 말을 들은 후로는 스튜디오가 된 지하의 모습을 종종 상상한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함께 음에 대해 고민하고, 테크닉에 대해 고민하고, 음악에 대해 고민하며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모습을 그리게 된다. 어제는 그 일의 첫 발자국을 내디딘 날로 느껴졌고, 나의 고민이 한순간에 사라질 정도로 너무나도 큰 행복이 몰려오는 것을 보며 나는 음악을 정말 좋아해, 아니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라고 확신하게 됐다.


어제는 20세기 소년을 다녀간 지인에게서 내가 행복해 보여서 좋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말을 계기로 내가 힘들어하는 것은 단지 부분일 뿐이고 나는 이곳에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며 새롭게 태어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어제의 아름다운 기억을 만들 수 있던 것은 늘 그렇듯 20세기 소년을 지켜주는 사람들 덕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바쁘게 일하면서도 천피의 연주에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주는 그들에게 무한한 사랑과 감사를 느꼈다.

어쩌면 이곳에서 대단한 음악이 나올지도. 아니, 대단한 음악이 나오지 않을 수는 있지만, 아름다운 음악이 나올 것이라고 나는 어제의 일로 막연히 확신하게 되었다.


Joe Pass - The Song Is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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