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작가] 전원일기 보는 남자

in #zzan4 years ago (edited)

20191210_213921.jpg

<전원일기 보는 남자>

‘빌어먹을 영감탱이.... ’
설거지 물을 왈칵 쏟아버리며 오여사는 군시렁댔다. 거실 텔레비전 속 미스트롯 송가인의 목청이 숨 넘어 갈듯 하다.
“아, 그 소리 좀 줄이라고요, 골이 지끈거리네.... ”
텔레비전에 시선을 박고 있던 김과장이 그제서야 힐끗 돌아보고 리모콘을 찾는 기적을 한다. 큰일이다. 갈수록 텔레비전의 음량이 올라가고 작게 하는 말은 되묻기 일쑤다. 요즘 같아서는 여사들 모임의 단골 안줏감인 ‘젖은 낙엽’이 남 일이 아니다. 이삼 년 전만 해도 마냥 깔깔댔는데.
국이나 찌개가 있어야 하는 밥상이 벌써 30년째다. 남들은 언감생심이라는데 짜니, 싱겁니 불평 일색에 근래에는 밥상머리 잔소리가 더 늘었다. 이제 막 서른 넘긴 아들 녀석의 결혼과 딸애의 씀씀이가 추가된 것이다. 듣다 못한 오여사가 여자가 있어야 장가를 가지, 그렇게 장가 보내고 싶으면 도시에 전세라도 하나 장만해 주고 잔소리를 하라고 핀잔했으나 벽창우 같은 말만 반복한다.
“세상천지가 여잔데 여자가 왜 없어? 착실하고 얌전한 여자 소개받으면 돼지. 그리구 우리도 5만 원짜리 월세부터 시작했어.”
이쯤 되면 오여사는 아예 입을 다물어 버렸다. 숨을 참아도 코를 스치던 연탄불 가스 냄새가 진동하는 느낌이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하루 두세 번 탄 가는 일을 김과장은 별로 해 본 적이 없다. 평일에는 취해서 코를 골았고 주말에는 초상집 밤을 지켜주는 의리의 타짜였다. 그러고도 퇴직이 코앞인데 과장이라니. 누구는 만년 과장이라 여지껏 붙어 있는 거라고 하더라만.
더 밉살맞은 것은, 딸아이가 조그만 회사나마 취직해서 원룸 보증금 좀 보태 달랬는데 없다고 딱 잡아떼더니, 무슨 기념일이라고 선물 사다 주면 싫단 말 한 마디 없이 덥석 받는 것이다. 물론 박봉으로 두 아이 대학 졸업시키고 자리 잡도록 뒷바라지 하느라 늘 허덕인 것은 오여사가 더 잘 안다. 그래도 털어서 오백이라도 보탰으면 했는데 야박스럽게 굴더니 쥐꼬리만 한 월급에서 월세 떼면 남는 게 뭐 있다고 잔소린지. 그것도 청춘이라고 아이는 해외로 휴가여행 나가는 재미로 직장생활을 버티는 눈치던데.
헛바람만 잔뜩 들었다면서 숟가락 들고 쩝쩝대는 김과장의 입술을 오여사는 지긋이 노려보았다. 아무리 올챙이 적 기억 못하기로서니 술독에 빠져 빈 월급봉투 내놓던 인사가 할 말은 아니다.
그런 동상이몽도 잠깐, 대화가 김과장의 고향 쪽으로 방향을 튼다. 단톡방에서 확인한 동창 소식이 결국 돌아가실 때까지 지게 지고 양말짝 기워 신었던 자신의 아부지와 엄니에게로 귀결되었다. 맙소사, 서기 2010년에 마나님이 기워준 양말을 신고 손때로 반질거리는 지게에 나뭇짐 그득 짊어진 촌로라니.
오여사도 농사를 천직으로 알고 알뜰하게 거두어 자녀들을 키워낸 시부모를 대단하게 여기는 편이다. 그럼에도 오여사가 엄마를 비롯한 친정 문제를 꺼내 놓으면 김과장은 이야기를 건성으로 들으며 텔레비전만 쳐다보는데 그럴 때면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된 시부모까지 싫어졌다. 밥 먹이고 학교만 보내 놓으면 뭐하나, 인간성이 저 지경인데 하는 심사였다.
한번은 오여사가 왜 처가에 관심을 두지 않느냐, 당신 집안과 부모만 소중하냐 따져 물었다.
“처남들 있잖아.”
김과장은 섭섭함을 넘어 분노하는 오여사의 표정을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아니면 못 본 척 했거나. 그 이후로 오여사는 시가 쪽 이야기가 나올라치면 다 먹은 밥공기를 들고 냉큼 자리를 떴다. 역시 그 때쯤부터였던 것 같다, 김과장이 <전원일기>를 파기 시작한 것이.
언젠가, 오여사가 좋아하는 탤런트가 나오는 드라마에 열중하고 있는데 김과장이 들어오자마자 채널을 확 돌려 버린 적이 있었다. 잘 생긴데다 다정다감하고 여자 위할 줄 아는 남자의 해사한 웃음을 늙다리 좀비 같은 작자가 박살낸 꼴이었다.
‘나도 텔레비 좀 보자. 이게 니 꺼냐? 텔레비 들고 아주 나가든지.’
혀끝에서 맴도는 이 말을 꿀꺽 삼키고 쿵 소리가 나도록 방문을 닫고 들어간 오여사는 휴대폰으로 ‘황혼 이혼’과 ‘졸혼’에 대해 진지하게 검색하기 시작했다. 두어 시간 만에 거실로 나왔는데 김과장이 얼른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는 게 보였다. 김과장은 나이 먹더니 잔소리만 많아진 게 아니라 눈물도 흔해졌다. 유치하기는.... 오여사는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부엌으로 향했다.
텔레비전에 <전원일기>가 방영중이었다. 버전이 맞지 않아 화면 속 김혜자의 얼굴이 좌우로 퍼졌다. 촌스런 시골집 안방 밥상에 둘러앉은 식구들은 얼른 봐도 삼대 열 명은 됨직하다. 며느리 둘은 식사 수발을 들고 어머니 김혜자도 식구들을 챙기고 있다. 여러 식구가 함께 사니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고 불화가 아버지에게도 알려져서 아버지 최불암의 따끔한 가르침을 받은 후 서로 화해하고 화목하게 밥을 먹는다는 내용 같았다.
결혼을 앞두고 시댁 동네를 처음 방문했을 때 오여사는 너무나 <전원일기>스러운 분위기에 놀랐다. 낮은 돌담 위로 냄비가 건너가고 수다도 건너왔다. 집성촌답게 한 마을이 거의 다 친인척이었다.
그러나 오여사는 곧 실상을 간파했다. 복길할머니보다 더 참견 좋아하고 샘 많은 여자 노인네들과 줏대가 없는 남자 노인들. 복길엄마 저리 가라 구두스러운 시어머니와 영남엄마처럼 후덕하지만 분가만을 꿈꾸는 손위 동서. 특히 시아버지는 최불암 같은 어른이 아니라 제사와 장남을 위해 사는 것 같았다.
그런 흔해빠진 농촌풍경 속에 흘러내린 누런 코를 소매로 씩 문지르고 똥꼬까지 흘러내린 바지를 추키며 이집 저집을 내닫던 김과장이 있었을 것이다. 여름이면 매캐한 모깃불 사이로 두런두런, 겨울이면 메주 뜬 발꼬랑 내 진동하는 사랑방에서 새끼 꼬는 어른들 틈에서 저 바깥세상을 상상하던 아이.
이제 그 동네에는 머리 하얀 노인들만 남아 있다. 김과장 항렬 이하로는 모두 객지로 나갔고 퇴근 후에는, 오여사 말마따나 수불석권이 아니라 수불석콘, 리모콘을 꼭 쥐고 텔레비전 앞을 지키는 김과장들. 유일하게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200여개의 채널이 상시 대기 중이다. 시끄러운 케이팝과 더 시끄러운 정치판을 지나 만나는 <전원일기>는 얼마나 안정된 구도인지. 자식을 위해 지게를 지던 아버지와 아버지 말을 잘 따르는 자식들, 나도 그런 어른이 되고 싶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오여사는 김과장이 지겹다. 여사는 휴대폰을 집어 들어 급히 ‘여사들’과 약속 잡으며 곰팡내 진동하는 장롱 문짝을 닫듯 현관을 발로 밀어 닫으며 오늘도 탈출한다.

Sort:  

대상 미리 축하 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미리 성지순례하는곳이구나

성지 순례 왔습니다!
ㅋㅋㅋ 새해 복 많이 받으세오

오이형도 새해엔 예쁜 여사친 말구 여친 만나세요. ㅎㅎ

에잉... 무신 그런 과찬의 말씀을...

'여사'가 '과장'보다 높죠~ ㅎㅎㅎ
눈치 챙겨~

ㅎㅎㅎㅎ 그러네요. 과장쯤이야...

수불석콘… ㅋㅋㅋ 도잠님! 대상 축하드려요~~~

부끄럽사옵니다. ㅎㅎ

Coin Marketplace

STEEM 0.27
TRX 0.13
JST 0.032
BTC 60895.62
ETH 2917.92
USDT 1.00
SBD 3.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