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 깃든 詩 - 박경리/ 토지 75.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를 읽다보면 그 방대함과 등장인물들이 태생적이라 할
가난과 한에서 벗어나려 할수록 조여들던 질곡과 아침이슬처럼 사라지던
영화와 권세의 덧없음이 씨실과 날실처럼 서로의 삶을 교차하고 드나들면서
강물처럼 흘러 물살이 나를 휘감았다.
오래전에 삼국지를 세 번만 읽으면 세상사에 막힘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최근에 또 그와 비슷한 말을 들었다. 토지를 세 번만 정독하면
이루지 못 할 일이 없다고 한다.
우리 문학의 금자탑이라 할 토지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보석처럼 빛나는 문장을 발견하게 되는 행운이 찾아온다.
맑고 높은 하늘이 쨍!하고 깨어지는 소리라도 들릴 것 같은 둑길을 말을 몰려 지나가는 나그네 무명옷에 쌀쌀한 햇빛이 내려앉고 수수알의 모개를 다 꺾어버린 키 큰 수숫대가 산들산들 건성으로 움직이며 당산의 잡목숲이 미친 듯이 물들어서 그것도 우수수 우수수 나뭇잎들이 떨어지는 계절이면 재개 가을걷이를 끝낸 들판은 허룽해지는 것인데 이 근래 몇 해 동안 김훈장은 추수만 끝나면 어진지 모르게 사라졌다가 달포 가량 지난 뒤에 돌아오곤 했다.
숟가락을 놓고 낡은, 생채기 투성이가 된 소반을 멍청히 내려다보고 앉았는데 딸은 숭늉을 떠받쳐 가지고 왔다. 점아기가 식기 속에 밥이 고스란히 남은 것을 보고 근심한다.
그는 지금 그 과부 며느리의 청춘이 가엾어서 울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양반의 권위가 땅에 떨어져서 잡이들이 그 절대불가침의 영역을 침범하려는 세상 추세에 통분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김푼장의 울음은 이조 오백 년 저편에서 지탱해온 불길이 거져가는 데 대한 만가(輓歌) 였는지도 모른다.
-토지 제3편 종말과 발아(發芽) 14장, 사양(斜陽)의 만가(輓歌) 중에서-
제3회 zzan문학상공모 (zzan Prize for Liter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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