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보아에서 보낸 편지 6

in #zzan21 day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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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의 베렝탑. 적의 배를 감시하려고 건축되었는데, 나중엔 죄수를 가두었다고.
봄 햇살을 즐기는 현지인들과 관광객들로 탑 근처 광장이 북적인다. 바람을 타고 빠르게 지나가는 요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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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와는 다른 아제나스 두 마르 풍경.
바다의 방앗간이라고 한다. 계곡으로 흐르는 물을 받아 방아를 찧었다고. 오늘 아침의 바다는 사뭇 잔잔하여 어제와 대조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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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네에 가장 비싸다는 식당에서 돔 구이를 먹었다. 싱싱한 맛이 일품이긴 했는데, 와인 값이 비쌌다.
사실 그보다는 마주 보이는 테이블의 어느 가족이 더 신경 쓰였다.

잘 해야 삼십대 중반인 부부가 쭉쭉이를 빠는 여자 아이를 데리고 와서 음식을 주문했다. 여자는 남자를 보지 않았다. 남자는 선그라스를 쓴 채로 밥을 먹었는데, 여자에게 말을 했지만 둘 다 웃지 않았다.

남자는 디저트로 나온 음식을 휴대폰으로 찍었고, 그걸 여자에게 보여줬으나 여자는 칭얼대는 아이를 달래느라 보지 않았다.

화장실에 다녀온 여자가 유아차에 아이를 태우고 나갔고 남자는 돈 계산을 하고는 뒤따라 나갔다.

가장 경치 좋다고 소문난 동네에 와서 비싼 음식을 먹고 떠나면서 그들은 한번도 웃지 않았다. 최소한 내가 눈치 안 채게 살펴본 선에서는.

삶은 누추하다.
아름다운 자연도, 금발의 인형같은 아기도 미소를 찾아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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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 너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졸업하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조용히 늙어 갔다.
어디선가 너도 나처럼 나이 들고 있겠지, 취한 눈으로 밤하늘을 올려다 보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다 30년 만에 너의 목소리를 들었다.
바로 기억 속에서 튀어 나온 그 목소리.

내가 너를 잊지 않았구나.

일상의 안부를 묻는 통화를 끝내고, 너무 빨리 끊었다고 자책하는 어리석은 나.

연결해준 친구로부터 받은 전화번호와 프로필 사진 속의 너는 놀라울 정도로 그 시절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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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로 먼저 연락해 볼 용기가 없는 나는 가끔 사진만 훔쳐본다.

그리움도 보물이 될 수 있음을 알게 해준 이여.
너는 나의 사우다드Saudade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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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경치 좋다고 소문난 동네에 와서 비싼 음식을 먹고 떠나면서 그들은 한번도 웃지 않았다.

말씀 하신 이 문장 왠지 모르게 서글픈 마음도 들고
참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하내요

여행에 의미를 넣어보자고 사람 관찰을 좀 했네요, 쓱형. ㅎㅎ

saudade
그리움, 향수, 갈망((포르투갈어에서 온 말))

마음 속 누구 있죠? ^^

여행이 무미건조해질까봐 10원짜리 감성 좀 칠해 봤습죠.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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