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장 참여] 나의 어린 시절: 처음으로 삥뜯긴 날

in #kr-writing7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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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중학교 1학년 때, 그러니까 내 키가 160이 아직 안됐을 때였다. 물론 지금도 작은 건 함정. 어쨌든, 그 나이또래에는 친구들끼리 학원에 다같이 몰려다니는 게 유행이었다. 나도 유행을 따랐다. 우리 학원은 내가 살던 동네에서 제일 유명한 큰 학원이었다. 학원계의 삼성전자라고나 할까.

어느 여름날이었다. 해질 무렵 나는 친구들과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귀가하는 중이었다. 우리는 자그마치 여섯 명이었다. 우리를 위해 평화롭고 넓게 펼쳐진 길 위에 우리는 학익진을 펼치고 걸었다. 나는 맨 오른쪽이었다. 이게 시발(始發)이었다.

우리 맞은 편에는 노란색, 핑크색 티셔츠를 입은 고딩 형아 두 명이 비틀비틀 걸어오고 있었다. 딱 봐도 취했다.(잠깐, 고딩인데 취했다고?) 나는 상황 파악을 잘한다. 너무나 무서웠다. 그 형들이 10m 사정거리에 들어왔을 때 난 이미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숨 쉬면 나의 존재를 들킬 것만 같았다.

그 형들은, 키도 컸다. 옷도 잘 노는 형처럼 입었다. (그냥 노랑, 분홍 티셔츤데...) 머리도 샤기컷이었다. (이게 핵심이었다.) 그당시 나와 친구들 5인방은 귀두컷이었다. 그리고 화룡점정으로, 취해있었다. 딱 봐도 고딩인데 취해있었다는 건, 저 형들은 무서운 형들이라는 소리다.

다시 말하지만, 난 맨 오른쪽에 있었다. 그 형들이 내 오른쪽 어깨빵을 치면서 시비를 걸 것 같았다.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오른쪽으로 이동해야 했다. 그래야 내 반대편 맨 왼쪽에 있는 녀석이 어깨빵을 당하니까.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어깨빵이라면, 그건 내가 아니어야 한다.

그런데 저 녀석도 눈치가 보통이 아니었다. 내가 친구들을 오른쪽으로 유인하자 저 녀석은 단순히 끌려오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튀어나갔다! 결국 우리 무리는 3:3으로 갈라졌다. 이제 내가 걸릴 확률은 2:1이다. 아니, 오히려 더 낮아졌다! 가운데 있던 두놈도 타깃이 됐으니까 4명 중 하나다!

그렇게 안심하던 찰나, 핑크 형이 방향을 확 틀어 내게 돌진했다. 그리고 난 보기좋게 어깨빵을 당했다. 생각할 틈도, 피할 틈도 없었다. 멀쩡히 가던 나한테 미식축구 하듯 달려들었으니까. 그러고선 개빡쳤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 핑크 형이 말했다. "아~나~ 야ㅡㅡ 사과 안하냐?" 지가 달려들었는데 사과는 내가 해야했다. "죄..죄송합니다." 사과했다. 거기서 시시비비를 가리자는 건 제정신으로는 못할 짓이다.

처음부터 내 계산은 틀렸다. 아니, 틀린 게 아니라 할 필요도 없는 계산이었다. 그 형들은 처음부터 우리 무리 중 제일 순둥하게 생기고 왜소했던 나를 타깃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제 난 어떻게 되는거지?" "이대로 중국으로 끌려가 인신매매 당하는건가?" "아니면 죽기 직전까지 패고 앵벌이 시키는건가?" 그때 나는 매우 가능성 높은 후보들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생각해보니까 우린 여섯 명이고 저 형들은 2명이잖아! 다구리 까면 이길 수 있어!" 라고 생각했을 때, 내 친구들은 이미 운동회 날 달리기 시합에서 흠모하던 여학생이 응원할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100m 쯤 멀어져가고 있었다. 평소에 축구 하던 새X들이라 그런지 정말 잘도 뛰었다.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한 놈이 남아있었다. 달리기가 느린 녀석이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의리있는 놈'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우리 둘은 그 형들한테 아파트단지 옆 풀밭으로 끌려갔다. 어쨌든 항구는 아니니 목숨은 건졌구나 싶었다.

핑크 형이 말했다. "야, 돈 있냐?" 마치 드라마 속 주인공들이 "요즘 너답지 않아..", "나 다운 게 뭔데?" 이런 귀에 박힌 대사를 하는 것처럼 뻔한 대사였다. 아 깜빡하고 이제서야 서술한다. 난 그날 돈이 없었다. 같이 끌려온 내 친구도 없었다.

그 후로 옥신각신 하다가 결국 우린 어떻게 풀려났다. (나랑 내 친구랑 싸워보라는 둥, 서로 한대씩 때려보라는 둥 레알 변태 같은 소리만 했다.) 어쨌든 300m 쯤 가니 도망갔던 친구들이 있었다. 우린 다시 사이좋게 집에 걸어갔다. 꼭 위험할 때 옆에 있어줘야 친구인가? 그런게 어디있나.

다만, 그 중 4명은 지금 전혀 연락이 닿지 않지만 나와 같이 와준 친구는 지금도 내 베프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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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친구는 친구가 맨홀에 빠졌을 때 춥지 않도록 뚜껑을 덮어 주는 것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완전 현웃 터지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혹시나 다른 사람이 들추지 않도록 공사중 표지를 친절하게 치워줍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저도 빵터지고 갑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명언..... 명심하고 저도 실천하도록 하겠습니다.

ㅋㅋㅋㅋ와 새벽반 분들 진짜 개그맨들만 모이셨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사람들이...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 재밌게 읽고갑니다!!

감사합니다 ^^ 부끄럽네요 ㅎㅎ

음.. 인버스님도 이런 흑역사가..
마스크 쓴 모습만 보았을 때는 양아치 모두 때려잡으실 포스로 알고 보기 시작했었는데
그래도 우리는 모두 쓰디쓴 흑역사를 통해 성장해 나아가는 것 같습니다.

저는 한번은 뺐겼다가 그 억울함이 분에 치밀어 올라 대형 커터칼을 하나 가지고 다녔었죠.
결국 중학교때(제가 좀 놀던때) 또 돈달라 하던 녀석 목에다 들이대니
모두 조용히 끝냈었던 기억이..
가끔 돌면 앞뒤 재어보지 않는 성격땜시 ㅎㅎ

머 이제는 옛 추억이 되었지만
이제는 삥뜯는 애덜 대신 해킹해가는 애덜땜시 더 걱정이네요 ㅠㅠ

무척이나 재미있게 보고 갑니다 ^^

ㅋㅋㅋㅋㅋ 이젠 삥 뜯는 애들 대신 해킹해가는 애들이 걱정이라는 말씀이 너무 웃기네요 ㅎㅎㅎ 소철님 성격이 정말 화끈하시네요! 항상 뜨뜻미지근한 제 성격이 불만일 때가 많았는데 부럽습니다 ㅎㅎ. 아무래도 프로필 사진을 얼른 바꿔야겠어요 많은 분들이 제 첫인상을 악당(?)처럼 받아들이시더라구요 흑흑...

저랑 제 친구들도 무서운 언니 오빠들이 길 건너편에서 걸어오면 바닥 보고 빠른 속도로 반대로 돌아갔던ㅋㅋㅋ기억이 나네요ㅋㅋ 그 언니 오빠들 만의 포쓰가 있었죠.. 레이어드 컷이라던가, 형광색 옷차림이라던가. 아직도 잊지 못하는 쨍한 빨강색 셔츠에 형광팬 연두색의 넥타이....

크.......... 바로 그겁니다... 그리고 저를 처다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으면 정말 무서워져요. 생각해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그런 경험이 없네요.. 요즘 중딩들은 여전히 이런거 느끼려나 ㅡ.ㅡ

ㅋㅋㅋ 베프를 만든 웃픈얘기군요 ㅎㅎ 잘보았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감사합니다. 친구란 자고로 역경을 헤쳐나가면서 만들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인버스님은 여리여리하고 순둥순둥한 분이신건가???ㅎㅎㅎㅎㅎ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성격은 그렇지 않지만 외모는 객관적으로 그런 것 같습니다....ㅋㅋㅋㅋ

상황적인 묘사가 아주 리얼 합니다 당시에 얼마나 겁나고 두렵고 괴로웠을까요? 아유 그래도 큰일 안당해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남자들은 잘한얘기 강한얘기 하길 좋아 하는데 "삥 뜯긴 얘기" 는 정말 어지간한 남자는 말 못한는건데 .... 리얼 "삥" 잘 읽고 갑니다

ㅋㅋㅋㅋㅋㅋ 친구들 사이에선 너무나 유명한 일화가 돼버려서 이젠 그닥 부끄럽지도 않군요ㅠㅠ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ㅎㅎ^^

ㅎㅎ 재미있습니다. 조심스레 순위권에 드실 거라고 추측해봅니다. :)

ㅎㅎㅎㅎ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셨다니 기분이 좋네요...!!!^^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ㅋㅋㅋㅋ
전 학창시절에 운이 좋았구나란 생각도 잠시 ㅋㅋ

ㅎㅎㅎㅎㅎㅎㅎ 이런 추억도 나름 재미있게 떠들 스 있는 안줏거리입니다 ㅋㅋㅋㅋ부끄럽지만요.... ㅠㅠ

재미있게 보고 갑니다.

친구란것이 상황따라 변하면 아니 되는데...

ㅎㅎㅎㅎㅎ 재미있으셨다니 감사합니다 ^^ 지금은 재밌는 경험이었다고 웃어넘길 수 있으니 다행이지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