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용 장군의 사이공 억류기) 12 치화형무소의 한국인 어린이
10월 18일 수감자들에게 좋은 옷을 입고 사진을 찍은 후 지문을 채취할 준비를 하라고 했다.
10월 20일 안닝노이찡으로 보이는 낮선 사람들이 수시로 감방 쪽문을 열고 이대용을 뚫어지게 드려다보고 돌아가곤했다.
10월 26일 이대용은 긴장을 풀기위해 영어사전을 뒤적이며 들여다 보았다. 그러나 정신이 집중되지 않았다. 소문을 들어 알고 있던 북한공작원들을 만나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그 이후 2개월 넘게 아무런 심문도 없었다.
12월 6일 사이공 시내 환뒹풍가 58번지에 있는 이순흥 자치회장으로부터 약 10kg 정도의 차입품이 들어왔다. 작은 치약 칫솔, 과자류, 비타민A, 마른새우, 설탕, 짜봉, 말린바나나, 땅콩, 육포, 담배, 성냥, 과일, 러닝 2, 팬티1, 소화제 등이었다.
특수격리감방에 수용된 정치범에 대한 차입은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허용된 것은 아마도 국제 적십자사나 프랑스 정부의 도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정부가 베트남에 수감된 외교관들을 구출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제 북한으로 끌려갈 가능성이 매우 낮아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비원에게 부탁해서 사탕 20개를 4층 제7호 감방에 있는 한국 어린아이에게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제7호 감방에는 지원이라는 한국인이 네살난 아들과 함께 수감되어 있었다. 지원은 사이공 변두리에서 월남인 부인과 같이 살다가 사이공 함락후 체포되었다. 이대용은 지원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가 형무소에 들어와서야 알게 되었다. 지원은 건축기술자였고 지난 7월에 아들과 함께 체포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1975년 11월과 12월은 60년만의 이상저온으로 쌀쌀한 날씨가 계속되었다.
12월 26일, 이대용의 부인 생일이었다. 이대용의 부인이 4월 6일 사이공을 떠날 때 하던 말을 떠 올렸다.
“당신은 너무 겁이 없어 걱정이예요. 당신 혼자만 남겨놓고 떠나니 불안해요. 모든 것을 조심해서 해야해요. 용감한 것이 전부는 아니예요. 용감한 행동도 좋지만 신중하게 생각해서 하세요. 당신은 혼자 몸이 아니에요. 당신 옆에는 아내와 네명이 아이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12월 31일, 이순흥 교민자치회장으로부터 다시 약 15kg의 식료품과 일용품이 차입되었다. 이대용은 경비원을 통해 사탕 20개와 땅콩엿 2개를 제7호 감방의 어린이에게 다시 보냈다.
1976년 1월 29일 오전 8시 반경, 아침 허기를 달래면서 식사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제7호 감방 쪽에서 정적을 깨뜨리며 어린아이의 월남 노래소리가 들렸다. 한국어린아이의 노래소리였다. 간수가 복도에 앉아 있는 시간에 중범자 감방에서 노래소리가 들려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곧 이어서 다시 한 곡이 더 들려왔다. 지원 부자가 석방되면서 네살난 어린 아들이 남기고간 이별의 노래였다.
이대용은 이들이 떠나가고 나서 치화형무소에 수감된 한국인은 자신혼자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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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title] 현실이 드라마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는걸 이 사건을 보면서 느끼게 되었네요;; kr-title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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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서도 나눌 것이 있군요.
실제로 있었던 일임에도 마치 소설을 읽고 있는 것 같습니다~^^
4살난 어린아이가 무엇을 안다고 차디찬 감옥에 수용했을까요...ㅠㅠ
홀로 남겨진 장군님의 심정은 또 어떻고...